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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념일을 알아보자!!(2월3월,4월)

이형호 2019. 4. 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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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과 국경일 구분 할 수 있나요??

오늘은 기념일과 국경일의 차이를 알아보고 국경일에 비해 덜 알려진 기념일에 대해서 월별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념일 - 대한민국 정부가 주관하여 전국적 또는 지역적으로 의식과 부수되는 진행되는 행사를 말합니다. 


국경일-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벌률로 정한 경사스러운 날을 말합니다.

국경일은 대부분 공휴일로 정해져 있고 각종 기념식과 경축해사를 하며 가정에서는 국기를 게양합니다.


2월

▶ 2.28민주운동 기념일 -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대구시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로 이후 3.15마산의거 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발단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은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것이 발단이 됩니다.


3월 

납세자의 날(3.3) 국민의 성실 납세에 감사하고 , 세금의 중요성을 알리는 행사를 합니다.


3.8민주의거 기념일 -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3월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대전시에서 대전지역 고등학생 1000여명의 주도로 일어난 학생의거로 이 시위에서 학생을 무차별로 구타하고 연행하는 경찰에 분개하여 ,3월10일에 더 많은 대전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에 맞서 투석전까지 벌이는 규모로 시위가 커졌습니다.

3.8민주의거는 이후 3.15마산의거 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15 마산 의거 - 1960년 3월1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 (현 창원시)에서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이며,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롭게 거사를 했다는 뜻에서 3.15의거라고도 부릅니다.

3.15마산의거는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내 용 -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10시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이내 시위를 준비했다.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하였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히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파출소장의 집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 또한,4월11일 아침 당시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혁명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주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으로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상공의 날 (셋째 수요일) -  상공업의 진흥을 촉진하는 행사를 한다.


서해수호의 날 (넷째 금요일) -

2016년부터 기념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2002년 제2연평해전,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2010년 연평도 포격 등 서해에서 발생한 북한의 도발을 상기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의 서해 수호를 위한 희생을 기리고, 국토 수호 결의를 다지며, 국민의 안보의식을 결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재정되었습니다.

더불어 북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나라를 지킨 영울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ㅇ아 서해를 지켜내자는 의미 또한 내포되어 있습니다.

-2010년 3월26일 금요일 북한 잠수정 어뢰 공격으로 승조원 104명중 46명이 사망해 대한민국 국군의 피해 중 가장 컸던 천안함 피격 사건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에 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수호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4월 과학의달!!


제주 4.3사건  -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배경 -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시작 -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9]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예비군의 날 (첫째 금요일) 모든 예비군이 참가하여 국가방위의 임무를 새롭게 다짐하는 행사를 한다.

식목일(5일) 나무 심기를 통하여 국민의 나무 사랑 정신을 북돋우고, 산지(山地)의 자원화를 위한 행사를 한다.


보건의날 (7일) 국민보건 향상을 위한 관련 분야의 각종 행사를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선열의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정한 기념일입니다. 1989년까지 학국독립유공자협회에서 주관하던 기념식을 대한민국 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11일을 기념하고자 1989년 12월 30일에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고, 1990년 4월 13일 제71주년 기념식부터 정부의 주관 행사로 현재까지 거행하고 있습니다.

2018년까지는 4월13일에 거해하였으나, 역사 자료를 추가로 발견하여 역사학계의 의견을 받아 들여 2019년부터 4월11일에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4.19혁명 기념일 (19일)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대한민국 전지역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남으로써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게 된 4.19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지정한 날입니다. 

서울 수유리의 4.19공원묘지를 중심으로 각종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장애인의 날(20일)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높이는 행사를 한다.


과학의 날(21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높이고, 모든 국민생활의 과학화 추진과 관련된 행사를 한다.


정보통신의 날(22일) 정보통신의 중요성과 의의를 높이고, 정보통신사업의 발전을 다짐하며, 관계 종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행사를 한다.


법의 날(25일) 국민의 준법정신을 함양하고, 법의 존엄성과 관련된 행사를 한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28일) 충무공 이순신의 숭고한 충의를 길이 빛내는 행사를 한다.



 3.15부정선거?? 


3.15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1960년 3월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고 , 이승만 후부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결과는 부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로 밝혀지게 됩니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되죠.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이정재,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해하게 됩니다.


부정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아파바다에 유기되서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데모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습니다.

하야 후 한달 간 사저인 이화장에서 머물다 병환 치료차 하와이로 떠났는데 이후 장면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의해 귀국이 막히면서 하와이에서 영면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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